국내항공역사  
(주)대한항공의 설립

민영항공사의 정착 /대형여객기 시대의 개막/1980년대의 도약

 
1980년대의 도약


1) 항공기의 도입
 

1982년과 1983년은 80년대 초의 경기 침체 및 신형기의 대량 도입에 따른 공급 과잉 현상으로 대한항공의 항공기 투자가 극도로 위축되었던 해였다. 그런데 1983년을 고비로 세계 경제는 제2차 석유파동의 충격에서 점차 회복되는 추세를 보였으며 항공 수요 또한 완만한 성장 추세를 보였다.

그러던 중 1983년 9월 사할린 상공에서의 KE007기 피격 사건으로 B-747 여객기 1대가 멸실됨으로써 장거리 노선에 대한 공급 부족 현상이 발생하게 되어 1984년 3월에 대한항공은 1984년 12월과 1985년 4월에 각각 B-747-300 1대씩을 인도 받는 것을 조건으로 보잉사와 구입 계약을 체결했다.

1984년 12월 12일과 1985년 4월 19일에 B-747-SUD 1번기(HL7468)와 2번기(HL7469)를 도입한 대한항공은 이를 차례로 미주노선에 투입했다. 당시 서울-로스앤젤레스 구간 직항편에 투입되던 기존의 기종은 JT9D-7Q 엔진이 장착된 B-747-200B 기종이었다. 이 기종은 서울-로스앤젤레스 구간은 좌석수(400석)만큼 승객을 수송할 수 있으나 로스앤젤레스-서울 구간은 승객수를 제한하여 운항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특히 겨울에는 상층풍(upper wind)의 영향으로 승객을 300명으로 제한해야 하며 예약 승객이 초과할 때에는 앵커리지를 경유하여 운항해야 하는 등의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종전의 직행편 운영상의 어려움은 서울-로스앤젤레스간 논스톱편에 B-747-SUD기가 투입됨으로써 완전히 해결되었으며, 대한항공은 미주노선에서 명실 상부한 논스톱 서비스의 신기원을 열게 되었다.

1983년 당시 대한항공은 제2차 석유파동으로 인한 불황 극복의 일환으로 보유 B-747 화물기 4대 중 2대를 사우디항공에 임대하고 있었는데 수요 회복으로 화물 공급력의 부족 현상이 나타났다.

화물기의 단기임차 및 신형기도입이 여의치 못한 가운데 1983년 12월에 발생한 앵커리지공항에서의 사고로 인한 DC-10 화물기 멸실 및 노후 B-707 화물기 처분 등으로 대한항공의 화물기 공급력 부족 현상은 심화되었다. 이에 따라 1984년초 사우디항공과의 협상을 통해 임대 중이던 B-747 화물기 2대를 반환받아 1984년 3월, 영업에 투입함으로써 화물기 공급력 부족 현상은 당분간 해소되었다.

그러나 1984년 하반기에 이르러서는 항공화물 수요전망이 한결 밝아진 상태에서 1984년 9월에 사우디항공은 또 다시 대한항공에 화물기 지원을 요청해 왔다. 그 내용은 1985년부터 사우디항공 화물 노선의 운영을 대행해 주거나 아니면 승무원, 기체 정비 등 일체를 포함하는 웨트 리싱(wet leasing )으로 한 대 또는 두 대의 대한항공 화물기를 임대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당시 대한항공은 화물기를 임대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사우디항공의 화물기 지원 요청에 응하기가 곤란했다. 그러나 사우디항공과의 우호 관계를 감안, 화물기를 지원키로 하고 그 방법을 모색하던 중 중고 화물기 1대를 대한항공이 도입한 후 사우디항공에 임대하는 방안을 추진키로 결정하고 대상 항공기 확보에 착수했다.

그 과정에서 에어 아프리크(Air Afrique)의 B-747F기와 과거 대한항공이 임차 운영하다 1979년 월드항공(World Airways )에 반환한 B-747F 2대가 물망에 올랐다. 결국 월드항공의 항공기를 임차 구매하여 사우디항공에 임대하기로 결정한 대한항공은 1985년 4월 월드항공으로부터 항공기를 인수한 후 즉시 사우디항공에 인도했다.

보잉사와 협상중이던 신형 B-747 화물기의 도입에는 신조기의 대당 가격이 1억1,000만달러를 상회하는 관계로 상당한 자금 부담이 따라 가격 면에서나 성능, 엔진 타입 등에서 대한항공에 적합한 보잉사의 신형 화물기 구매 계획을 취소하고 에어 아프리크 소유 B-747화물기를 도입하기로 결정하고 1985년 6월 구매 계약을 체결했다.

이처럼 1982년 7월 B-747 여객기 도입 후 2년 5개월의 공백 후에 이루어진 대한항공의 B-747기 도입은 1984년, 1985년 두 해 동안 총 4대(여객기 2대, 화물기 2대)를 구매하여 대한항공은 1985년 말에는 총 17대의 B-747항공기를 소유하게 되었다.

   
2) 국제선의 확충
 

대한항공의 중동노선은 1976년 7월 14일의 바레인 취항 이후 계속적인 중동 건설 경기 호조에 힘입어 1980년대 초의 어려운 여건 하에서도 매년 급성장을 거듭했다. 중동노선은 수입 증대 측면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석유 파동에 따른 원가 압박으로 적자운영에 고심하고 있던 대한항공의 적자폭을 좁혀 주는 역할을 해왔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고 있었다.

1980년대초의 중동노선의 흑자 규모는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대한항공이 적자의 늪에 빠져 있던 1980년과 1981년의 중동노선의 흑자는 같은 해의 총 적자 규모를 크게 상회함으로써 수지 측면에서 지대한 공헌을 했다. 1982년 한 해 동안의 중동노선의 흑자 규모는 501억원이었는데 이는 이 해에 대한항공이 적자의 늪에서 탈출, 노선 수지 102억원의 흑자로 반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1982년을 분수령으로 하여 우리나라의 중동건설 수주 실적은 감소하기 시작했는데 이에 따라 한국인 근로자의 중동 진출도 매년 감소하게 되었다. 1981년 127억달러 이었던 중동건설 수주액은 이후 매년 감소, 1984년에는 59억달러로 절반 이상 줄어들었으며 중동 송출인력도 매년 줄어들었다.

1984년 1월 1일부터 시행된 50세 이상 내국인의 해외 여행 자유화 조치 및 외국 항공사의 서울 취항 러시 등에 대한 대비책으로 대한항공은 1984년 4월 3일에 쿠알라룸푸르 여객 노선을, 1984년 6월 20일에는 프랑크푸르트 여객 노선을 개설했다. 이어서 대한항공과 에어프랑스와의 상무 협정에 규정되어 있는 대한항공 제3편 운항의 전제 조건인 서울-파리 구간 수송 실적 6만명을 1985년 6월에 수송 실적을 달성함으로써 1985년 7월 1일에 파리 제3편을 운항하게 되었다.

 
가) 미주 노선
 

1957년 4월 24일 체결된 이후 수 차례에 걸쳐 개정된 한미항공협정은 항공 자유화 정책에 기초한 협정이기는 했지만 그 내용은 지극히 불평등한 것이었다. 미국이 한국에 취항할 수 있는 지점, 운항횟수, 기종, 이원권 행사 등은 무제한인 반면, 대한항공이 미국에 취항할 수 있는 도시는 로스앤젤레스, 호놀룰루, 뉴욕의 세 지점으로 국한되어 있었고 다만 이들 3개 도시에 대한 운항 기종과 횟수 제한이 없다는 것이 불평등을 부분적으로 보완해 줄 뿐이었다.

이에 1980년부터 미국내의 주요 거점 도시인 시카고와 샌프란시스코 취항을 추진하기 위해 한미항공협정 개정 노력을 계속해 왔었다. 그러나 이러한 한국측의 노력은 미국측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했고 결국 시카고와 샌프란시스코에의 정기편 취항은 훗날의 과제로 남겨지게 되었다.

1985년 3월 현재 서울-로스앤젤레스 구간을 운항하는 대한항공 항공편의 운항 횟수는 총 11회였다. 그 중 도쿄, 호놀룰루를 경유하는 KE-001/2편이 주 4회, 직항하는 KE-001/2편과 KE-015/6편이 각각 주 3회와 주 4회였는데 로스앤젤레스발 KE-015/6편은 허용 탑재량(ACL) 부족으로 앵커리지를 경유하여 운항했으며 B747기를 사용하는 KE001/2편은 직항편이었다.

이러한 제반 사정을 고려하여 대한항공은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정기편 취항이 성사될 때까지 미국 항공법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정기성 퍼블릭 차터를 운영하기로 결정하고 1985년 5월 미국 정부에 인가를 신청했다. 유나이티드항공과 노스웨스트항공의 결사적인 반대가 있었으나 우여곡절 끝에 차터 운항 허가를 얻어 낸 대한항공은 마침내 1985년 5월 30일 서울-샌프란시스코-시카고 퍼블릭 차터로 주 1회 운항을 개시했다.

이로써 대한항공은 시카고, 샌프란시스코에 장차 정기편을 취항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으며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교민 및 승객들에게 큰 편의를 제공하게 되었고, 1984년 말과 1985년 초에 각각 도입한 2대의 B-747-SUD기를 활용하고 미국 동부 지역에서의 시장 점유율을 확대하기 위해 1985년 대한항공은 서울-뉴욕 노선을 주2회 증편하였다.

종전 주4회 운항하던 것을 1985년 4월과 6월 각각 1회씩 증편하여 주 6회로 늘리면서 서울-뉴욕간을 논스톱으로 운항(서울-뉴욕 논스톱, 뉴욕-서울 앵커리지 경유 운항)하는 방안과 서울 출발 시간을 오전과 오후로 나누는 스케쥴 이원화 방안 등을 다각도로 검토했는데, 결국 1986년 4월 뉴욕 논스톱편을 개설하여 주 7회 운항하고 앵커리지 경유편을 주 3회 추가 운항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서울-뉴욕간 여객편은 주 10회로 늘어나게 되었다.

 
나) 구주 노선
 

1980년 4월 15일에 대한항공과 루프트한자간에 화물기 취항을 위한 공동운항협정(KE/LH Joint Freighter Agreement)이 정식 체결되어 대한항공은 1980년 5월 1일부터 서울-프랑크푸르트 구간을 B-707 화물기로 주 1회 취항하게 되었다.

그후 대한항공과 루프트한자항공은 시장성 검토를 위한 자료 교환 및 수차례의 협의를 거쳐 마침내 1984년 5월 17일에 여객기 취항을 위한 새로운 협정서(KE/AH Joint Venture Agreement)에 서명함으로써 대한항공은 프랑크푸르트 여객편을 취항시키게 되었다.

운항 형태는 양사가 각각 주 1회씩 공동 운항하는 방식으로 하고 여객 100석, 화물 1.4톤의 공급을 50 대 50으로 할당하여 판매하기로 했다. 그러나 대한항공이 먼저 취항하게 됨에 따라 루프트한자는 대한항공의 여객 좌석, 화물 스페이스를 이용해 판매하고 수입과 운항 비용은 양사가 반씩 나누기로 했다. 그리하여 대한항공은 서울-파리간을 주2회 운항하던 KE-901/2편 중 수요일 편을 KE-905/6편으로 편명을 바꾸고 프랑크푸르트까지 연장 운항하게 되었다.

여객의 판매 방침은 1) 프랑크푸르트노선은 순수 한국-프랑크푸르트간 왕복 수요를 일차 대상으로 하고, 2) 한국-유럽간의 고수입단가 승객, 개인 여행 승객 수요를 우선 판매하며, 3) 대한항공과 루프트한자 공동 운항 수입단가 이상 승객을 우선적으로 유치하는 것으로 정했다.

그 결과 취항 첫해인 1984년에는 총 2,877명을 수송하여 1회 왕복 편당 평균 103명, 1985년에는 총 9,659명을 수송하여 1회 왕복 편당 평균 186명이라는 좋은 실적을 기록했다. 이로써 대한항공은 1986년에 서울-프랑크푸르트 구간을 단독 취항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3) 국내선 노선 확충
 

1980년 한 차례의 마이너스 성장을 경험했던 한국 경제는 그후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의 경기 회복과 유가와 금리의 안정에 힘입어 다시 성장 궤도에 진입하여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노선과 영업망 확충, 국내선용 항공기 도입 및 보유 기종의 현대화 계획을 추진했다.

대한항공은 국내선의 노선 확장 및 보유 기종 현대화 계획의 일환으로 1984년부터 F-28기 및 MD-82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네덜란드의 포커사로부터 1984년 7월에 F-28 1번기, 1985년 6월에 F-28 2번기를 인수한 대한항공은 이를 서울-대구, 서울-울산, 서울-속초 등 국내선 지선 구간에 집중 투입했다.

1985년 5월 9일에 6대의 구매 계약을 체결한 MD-82 기종은 1985년부터 1987년까지 매년 2대씩 도입하기로 했으며 1985년 8월 그 중 2대를 인수했다. 미국 맥도널더글러스사에서 제작한 MD-82는 대기 오염 방지 및 연료 절감효과가 큰 중단거리용 최신 기종으로서 그 동안 서울-부산 및 서울-제주노선에서 운항중이던 B-707과 교체하여 집중 투입되었다.

대한항공의 꾸준한 국내선 노선 확충과 공급 증대에 힘입어 1984년과 1985년 두 해 동안에만도 대한항공 이용 승객은 매년 30%씩 증가하여 1985년 말에는 이용 승객이 340만명을 상회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대한항공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속초-부산 및 울산-제주 노선은 이용 부진으로 말미암아 1985년 12월 1일과 12월 20일에 각각 운항을 중단하였다.

이처럼 대한항공은 1985년까지 총 15개의 국내 정기 노선 및 1개의 헬기 부정기 노선을 확보함으로써 항공기라는 가장 빠른 교통 수단을 고객에게 제공하고 서비스를 향상시키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역간의 균형 발전을 도모하고 전국의 생활권을 1시간대로 묶는 데에도 커다란 역할을 했다.

 
4) 화물 운송의 강화
 

대한항공이 출범한 1969년 이전의 국제 교역 물량은 대부분 선박으로 수송되었기 때문에 항공화물 수요는 일차산업 상품 및 일부 견본품, 우편물이 여객기의 화물칸에 실려 나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와 개발 도상국의 수출 진흥 정책으로 항공 화물 수요는 지속적으로 증가했으며 일본 등 선진국의 전자제품이 항공기로 수송되기 시작함으로써 양질의 항공화물 시장이 형성되었다.

1980년대에 들어와 신흥 공업국들은 선진국들이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하여 수입 규제를 강화하자 이에 대한 대응으로 고도 기술품 개발로 전환하여 VTR, 컴퓨터, 반도체 등의 전자제품류와 자동차 부품 등의 수출에 주력하게 되었는데, 이를 수송하기 위한 항공 수요가 급증함으로써 항공 화물 시장의 구조적 변화가 이루어졌다. 이처럼 아시아 신흥 공업국들의 경제 발전 및 수출 신장에 따라 항공 수송도 급증했으며 특히 미국과 동남아간의 가공 무역으로 인한 물동량 증대가 두드러진 현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항공화물 시장의 변화에 따라 대한항공은 서울 경유 제3국간 수송 방법(제6의 자유)을 이용하여 미국-동남아간 항공 수송에 집중적으로 공급을 증가시킴으로써 태평양노선이 항공 화물 수송에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또한 대한항공은 정부의 수출 다변화 정책에 적극 부응하기 위해 유럽 지역에 대한 공급도 대폭 증가시켰다.

화물 수송업계가 호황기를 누렸던 1984년에는 서울-도쿄 노선에 B-747 화물기가 투입되면서 물동량의 급격한 증가가 있었다. 이를 소화시키기 위하여 대한항공은 나리타공항에 연간 화물처리 능력 5만톤, 연건평 750평 규모의 전용 화물 터미널을 확보하고 이듬해인 1985년 1월 운영을 개시했다. 대한항공의 화물전용 터미널인 나리타공항의 화물 터미널 운영을 개시함으로써 일본 출발, 도착 화물이 원활하게 처리되었으며, 나리타 화물 터미널은 일본 지역의 화물기지로 자리잡게 되었다.

한편 1983년 김포공항을 시작으로 도쿄, 오사카, 부산, 타이페이, 홍콩, 로스앤젤레스, 뉴욕 등으로 확장되기 시작한 화물 예약-운송 전산시스템(ACE)은 1984년에는 7개국 16개 도시, 1985년에는 13개국 32개 도시로 확장됨으로써 화물운송 사업의 기반을 한층 강화시켰다.

이러한 세계 수출 시장의 흐름에 부응한 대한항공은 항공화물 수송 패턴의 변화 및 급속한 신장과 함께 대한항공 화물 사업의 근거지인 국내 화물 시장에서도 화물 대리점 및 혼재 화물업자의 급속한 성장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한국을 기점으로 하고 미주, 구주 노선을 간선으로 하는 대한항공의 화물 시장은 동남아, 일본 노선이 발전을 거듭함으로써 남미와 아프리카를 제외한 세계 전 대륙으로 뻗어 나갔다.

1985년 대한항공은 국제선 화물 톤킬로미터를 기준으로 한 국가별 순위에서 미국, 일본, 프랑스, 서독, 영국, 네덜란드에 이어 세계 7위의 화물 수송 실적을 기록했는데 이것은 이제 대한항공이 국제선 화물 수송에서 선진국 대열에 진입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